Seoul
벤

옛백야

철학의 무용성

철학은 필요 없는 지식만을 생산한다. 더 나아가 철학은 필요 없는 지식을 생산할 때에만 올바른 길을 걷는 것 같다. 역설적이게도 정말 그렇다. 어떤 사람이 제안한 철학적 입장이 과하게 과격하다면 그건 철학적 입장으로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철학은 우리 삶에 대한 올바른 설명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철학적 입장이 우리 삶을 전혀 설명하지 못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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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OO과 OO철학

종교철학을 처음 시작할 때 교수들은 이런 말로 나를 괴롭혔다: “종교철학에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철학적 신학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철학입니다.” 처음 이 말을 들을 땐 대체 뭔 소리를 하는 것일까 하면서 짜증을 부렸는데, 이제야 좀 이해가 간다. 비평철학을 공부하자거나 언어철학을 공부하자고 하면 어떤 사람들은 이런 것을 떠올린다. 마르크스나 푸코의 틀을 갖고 비평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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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럿

* <지평> 저자회의에서 파상과 토론 중에 어떤 말을 듣고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나는 왜 텍스트의 절대성을 강조하는 (그리고 그 텍스트 해석자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비평철학을 지지하고 있는가? 나의 기독교 신학적 배경이 크게 작용한 것 같다. 비평철학적 관점에서뿐 아니라 대부분의 영역에서 기독교적 배경이 짙게 묻어 있다. 체계와 절차를 강조하는 것, 글쓰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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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증 연습 (3): 양상 실재론 옹호 논증 하나

또다른 옹호 논증을 쓸지도 모르겠어서 ‘하나’라는 마커를 붙였다. 이것도 지평에 곧 공유할 예정이다. 이하는 <가능세계를 기술하는 술어는 현실 세계에서 그 술어가 표현하는 속성과 동일한 속성을 표현해야 한다>로부터 양상 실재론이 양상 문맥의 이해를 위해 반드시 전제되어야만 한다는 것에 대한 논증이다. 이에 대한 몇가지 반박 논증이 구성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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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안좋으면 사람이 고생한다(2)

지난 몇 달간 상담을 받으며, 또 모종의 사건들로 인해 내가 갖고 있던 과거 기억을 대부분 재편했다. 그러고 나니 나는 하여간 멋진 사람은 아니다. 그런 나를 발견하고 나니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이전의 나쁜 일들은 거부감을 일으킨다. 그러나 훌륭한 일을 하자니 나는 무자격자인 것 같다. 화해를 하고 훌륭한 일을 하면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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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안좋으면 사람이 고생한다

정리해두고싶은 철학적 직관들이 몇가지 있다. 철학항다는 것은 그런 직관들을 정합적인 체계 안에서 정당화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일단 일관된 체계가 있어야 나의 정당화된 직관이 현실에 비추어 옳은지 그른지 볼 수라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체계를 구성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다. 정당화시키지 못하면 개똥철학이고 정당화시키면 철학이고 정당화되고 또 맞는 말이면 일급철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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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와 성만찬

사실 성만찬례나 차례나, 친구끼리 오랜만에 만나서 추억팔이 하며 술 한 잔 하는 거나 그 요지는 크게 다르지 않다. 성만찬에 주의 영이 임재한다고 믿고나 친구와 만나 때로 술잔을 기울인다면 “이런 망할 귀신문화 어서 사라져야”라고 말할 것까지는 없다. 차례가 문제가 된다면 이를 준비하는 데에 관한 수고가 여성에게 편중된다는 점을 것이다. 차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