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백야
‘철학적 대화’
내가 철학을 한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기대할 법한 이미지가 있다. 그 중 하나는 이른바 ‘철학적 대화’를 기깔나게 하리라는 그런 기대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상하게도 그들이 기대하는 ‘그 대화’에 끼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 철학적 대화의 적절한 주제라고 통상 생각하는 많은 주제들이, 내가 보기로는 철학적으로는 매우 사소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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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철학을 한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기대할 법한 이미지가 있다. 그 중 하나는 이른바 ‘철학적 대화’를 기깔나게 하리라는 그런 기대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상하게도 그들이 기대하는 ‘그 대화’에 끼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 철학적 대화의 적절한 주제라고 통상 생각하는 많은 주제들이, 내가 보기로는 철학적으로는 매우 사소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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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의 여정은 이랬다: * 지난 1학기에 종합시험을 통과한 뒤 학위논문에 착수했다. 퍼트남의 내재적 실재론이 종교들에 대한 철학에 있어 갖는 다원주의적 함의를 밝힌 뒤 내재적 실재론을 옹호하는 것이 논문의 골자였다. 퍼트남에 관해 집중적으로 연구했던 외부 교수님을 부심으로 초빙했는데, 한편으로는 이 덕에 뿌듯한 연구가 가능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때문에 졸업이 곤경에 빠질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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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카르납주의는 오늘날 영미권 철학계에서 아주 빈번히 등장하는 분류이다. 이들은 존재론을 보다 연질의soft, 가벼운lightweight 것으로 간주한다. 이들은 양화사나 개념에 있어 가소성 내지 상대성이 원리적으로 보장된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진지한 문제란 존재론 내적internal 문제일 뿐이며, 존재론 외적external 문제는 상당히 사소한 것 내지 어쩌면 사이비 문제에 불과할 것임에 동의한다. 그리고 나 또한 이들의 방향성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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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설이란 두 방식으로 해소될 수 있다. 하나는, 역설을 일으키는 진술들이 그 명제차원에서는 모순되지 않음을 규명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진술들 중 하나 또는 몇몇을 제거함에 따라 모순을 제거하는 것이다. 전자는 사실, 일관된 진술 집합 및 그것을 비일관적이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사고 사이의 대립에서 후자를 제거하는 것에 해당한다. 결국 역설의 해소는 모순의 제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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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한다는 것은 공격적이게 말하는 일을 포함한다. 통념을 그저 반복하는 일은 유의미한 철학적 작업의 일부로 간주되기 어렵다. 그 경우 메타 담론인 철학과 대상 담론인 일상 언어 사이의 경계가 흐려지곤 한다는 점에서 철학적으로 여겨지기 어렵고, 그러한 반복은 학문적 가치가 없다는 점에서 학문적 작업으로 여겨지기 어렵다. 그런데 통념을 논박하는 일은, 특히 철학의 방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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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씨인사이드 말고, 데이빗 챠머스. 챠머스의 홈페이지에 있는 갤러리(http://consc.net/pics/)에 들어가곤 한다. 처음 이 곳을 알게 된 것은 한국 철학자들 몇몇을 검색하던 중 2008년 세계 철학자 대회(서울, 제22회) 사진 갤러리를 발견한 때였다. 한국의 유명한 교수들(정대현, 선우환, 신상규, 김기현, 윤보석 …)뿐 아니라 해외의 유명한 교수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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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예수를 우리의 최종적인 구원의 표지로 삼는다는 것이다. 정확히는, 예수라는 인물에 얽힌 어떤 고백들을, 구원에 관한 나의 최종적이고 표지적인 고백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역사 속에 있던 어떤 인물이 있었고, 바로 그 인물을 우리는 예수라고 부른다. 그리고 바로 그 예수에 관한 증언과 고백들로부터, 우리는 구원 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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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cebook 그룹, “Analytic Philosophy”에 공유된 영상. iai에서 진행한 티모시 윌리엄슨과의 인터뷰 중 일부이다. 윌리엄슨은 이시대 가장 걸출한 분석형이상학자 중 한 명이다. 그런 그가 “영미 철학의 문제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말이 흥미롭다: “영미 철학 전통의 주된 문제란,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 말[‘영미 철학’]을 사용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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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igious pluralism, … denote[s] the acceptance and even encouragement of diversity or (and perhaps because of) the view that salvation/liberation is to be found in all of the great world religion[.]” Chad Meister, “Introduction” in the Oxford Handbook of Religious Diversity. 마이스터의 앞의 말, 즉 “종교 다양성의 수용 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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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 나는 세월호 사건이나 (이른바) “국정농단 사태”의 경우에서의 박근혜 정부의 책임과, 코로나19 사태에서의 문재인 정부의 책임이 상이하다고 생각한다. 반면, 메르스 방역에 있어 박근혜 정부의 평가와, 코로나19 방역에 있어 문재인 정부의 평가가 대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논증. 세월호 사건에서와 국정농단 사태에서 박근혜 정부(또는 박근혜 개인)가 비판받았던 것은, 명시된 형식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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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묻는다. 왜 대륙철학과 달리 분석철학의 작업은 예술적 영향력이 크지 않은가? 분석철학의 작업에 영향받은 예술가는 왜, 니체에게 영향받은 수많은 이들과 달리, 없는가? 나는 이 질문이 애초에 잘못 놓였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어떤 철학에 있어서도 그것이 예술에 있어 갖는 역할은 없다. 다만 몇몇 철학자들의 저작은, 그것이 채택하는 표현이 유도하는 상상력으로 인해, 몇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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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철학자들이 자신을 칸티안이라고 부르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그만큼이나, 자신을 헤겔리안이라고 부르는 것을 치욕으로 여기는 것도 사실이다. 퍼트남은 어떠한가? 그는 스스로를 칸티안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해리슨은 그런 퍼트남을 개조하여 종교다원주의 모델을 만든다. 그런데 진정으로 그들이 칸티안이라면, 아주 진지한 칸티안인 힉과 배치된 모델을 만들 이유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힉과 해리슨은 아주 배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