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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백야

성령강림 혹은 부활

* 성령강림주일을 맞는다. 동시에 이한열의 죽음을 맞는다. 동시에 동료 친지의 부고를 맞는다. * 성령의 강림과 성도의 죽음은 어떠한 관계도 없어보인다. 그러나 실상 그 둘의 관계는 어떤 것보다 긴밀하다. 성령 강림 사건은 예수의 죽음 후에야 찾아왔다. 단지 시간 상으로만 이후인 것이 아니다. 예수의 죽음을 애도하는 바로 그 때 사건이 일어난다. * 성령 강림의 사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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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식과 잘못

* 죄의식과 잘못 사이에는 종종 괴리가 있다. 잘못은 어떤 사건의 유형인 반면 죄의식은 어떠한 사실에 있어 그 부정적 책임을 스스로에게 지우는 의식적 경향이기 때문이다. 후자의 경향은 심지어 실현된 적 없던 사태가 어떤 시점에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경우, 그 대상을 갖지 않으면서도 가능한 것이다. * 잘못을 의식하는 것과 허위의 죄의식을 강요받는 것은 어떤 차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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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보수성

* 통념보다 철학은 보수적인 작업을 하는 학문이다. 가장 정치적 실천을 중시하는듯 보이는 프랑스 현대 철학도 그렇다. 이른바 “생성의 철학”과 “진리의 철학”이 구분될 수 있다 해도, 이른바 “윤리적 전회”라는 것이 발생했다 해도, 철학적 작업은 어느 정도의 보수성에서 더 나아가지 않는다. 여기에서 언급되는 보수성은, 그것이 피분석항의 변혁에 관여하지 않기로 요구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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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들

* 크래머의 “해석학 비판: 해석철학과 실재론”을 읽는다. 독일 철학과 프랑스 철학을 주로 잇대는 우리의 경향에는 의아하게도, 그는 콰인과 로티, 데이빗슨과 퍼트남, 그리고 굿맨을 먼저 언급한다. 해석이라는 측면에서 적어도 앵글로색슨과 게르만, 로망스가 한 데 얽힌다. * 해석이라는 주제, 특히 해석의 다원성으로부터 나오는 존재/인식적 상대론에 대한 문제는 세 이질적 철학에서 공통적이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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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신학적 옹호

중세의 신학자들은 자연 세계를 통해 하나님의 본성이 고찰될 수 있었다고 믿었다. 한편으로 자연신학은 비판될 수 있다. 왜 그러한가? 자연세계 역시 하나님의 은총이 경유되지 않으면 하나의 계시로 발견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 비판은 아주 근대적인 정신에서 나올 뿐이다. 이 비판은 세속에 대한 신성의 존재론적 우위를 주장할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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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atio ex nihilio

“무로부터의 창조”가 가능한가?: 첫째. 신적 창조는 어떤 창조인가? 질료에 대한 창조라면, 그러한 창조는 무한퇴행적 창조이다. 신이 오로지 정신적인 것이 아닌 한 바로 그 신을 누군가가 창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이 오로지 정신적이라면, 그것은 질료적 차원에 인과적 영향을 줄 수 없다. 따라서 어떤 경우에도 질료에 대한 창조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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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

* 여러가지 방식의 치유가 있다. 어떤 문화는 치유를 위해 물리적 방식을 동원하고, 어떤 문화는 상징을, 어떤 문화는 언어를 동원한다. * 이원론적 종교가 하나의 치유 방식으로 작동한다. 어떻게? 탄원자의 특정한 결여에 대해, 그 결여를 악신의 책임에 돌린다. 문제는 여전히 남지만 그 탓은 저 멀리 있는 악신에게 있다. * 상담이 하나의 치유 방식으로 작동한다.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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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성

* 공정성이란 그런 것이다. 정말로 비상식적인 누군가가 있다. 또한 그 사람의 상식 없음이 사람들에게 불편을 초래한다, 또는 공무에 차질을 초래한다. 그 경우, 비상식적인 그 사람을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으로 하여금 상식을 갖게 하거나, 최선으로는 비상식적인 사람의 최대한을 포괄할 법한 정책을 기획하는 것이다. * 이른바 “태극기 시민”이 있고 “촛불 시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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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가지

* 이른바 “오지랖”이라는 것에 이물감을 크게 느끼는 요즈음이다. 직접적으로 드러난 것은 D의 여러 말들에 대한 과민한 반응이었다. 사실 그것이 유일한 징후이거나, 또는 원인이었던 것은 아니었을 터이다. 나는 자주 그런 간섭에 지쳐했고, A에 대해서도, 나의 경계를 넘어서는 듯한 그런 관심에는 쉽게 불편함을 느꼈다. 조금 달라졌는가 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전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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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신비로움

뭔가를 쓰고 나누는 것에 경력이야 짧다. 그럼에도 그 사이에 재미있는 발견을 한다. 시이건 설교문이건 그 밖의 다른 장르이건 글이 스스로 나를 특정한 수사로 인도하곤 하는 것이다. 의도하지 않는 중의적 문장(그리고 그것이 이중적인 심상을 만드는), 문단 간의 균형, 계획한 논증에는 포함되지 않던 주장의 흐름 등이 발견되는 것이다. 이러한 인도가 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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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1)

J 박사께서 역한 책을 읽는다. 헤겔의 종교철학적 입장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학부에서 헤겔을 배울 일이 없었다. 개론에서 다루기엔 너무 큰 주제이고, 헤겔만을 다루기엔 너무 깊어질 것이어서 그랬던 듯하다(우리 학교에는 헤겔 전공자⎯⎯참 이상한 단어이지만⎯가 없다). 여튼, 그래서 헤겔을 배울 일이 없었다. 저자의 헤겔 이해가 탁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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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형이상학적으로도”

하나의 사건이 추후에 재현될 수 없음에 대해 이전 글에서 “(나는 또한 형이상학적으로도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라고 덧붙였다. 왜 그런가? “야기되는 것”이라는 사건의 정의는 적어도 그것이 특정 시공간 점에서 나온 결과임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러한 점에서 나왔다면, 그 사건은 그 점에서 재현 또는 표상되어야만 한다. 그런데 바로 그 표상은 주체(그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