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백야
"영미철학의 주요 문제"
Facebook 그룹, “Analytic Philosophy”에 공유된 영상. iai에서 진행한 티모시 윌리엄슨과의 인터뷰 중 일부이다. 윌리엄슨은 이시대 가장 걸출한 분석형이상학자 중 한 명이다. 그런 그가 “영미 철학의 문제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말이 흥미롭다: “영미 철학 전통의 주된 문제란,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 말[‘영미 철학’]을 사용할
Wordpress에서 블로깅하던 시절의 포스트들
옛백야
Facebook 그룹, “Analytic Philosophy”에 공유된 영상. iai에서 진행한 티모시 윌리엄슨과의 인터뷰 중 일부이다. 윌리엄슨은 이시대 가장 걸출한 분석형이상학자 중 한 명이다. 그런 그가 “영미 철학의 문제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말이 흥미롭다: “영미 철학 전통의 주된 문제란,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 말[‘영미 철학’]을 사용할
옛백야
“Religious pluralism, … denote[s] the acceptance and even encouragement of diversity or (and perhaps because of) the view that salvation/liberation is to be found in all of the great world religion[.]” Chad Meister, “Introduction” in the Oxford Handbook of Religious Diversity. 마이스터의 앞의 말, 즉 “종교 다양성의 수용 및
옛백야
주장. 나는 세월호 사건이나 (이른바) “국정농단 사태”의 경우에서의 박근혜 정부의 책임과, 코로나19 사태에서의 문재인 정부의 책임이 상이하다고 생각한다. 반면, 메르스 방역에 있어 박근혜 정부의 평가와, 코로나19 방역에 있어 문재인 정부의 평가가 대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논증. 세월호 사건에서와 국정농단 사태에서 박근혜 정부(또는 박근혜 개인)가 비판받았던 것은, 명시된 형식적
옛백야
누군가가 묻는다. 왜 대륙철학과 달리 분석철학의 작업은 예술적 영향력이 크지 않은가? 분석철학의 작업에 영향받은 예술가는 왜, 니체에게 영향받은 수많은 이들과 달리, 없는가? 나는 이 질문이 애초에 잘못 놓였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어떤 철학에 있어서도 그것이 예술에 있어 갖는 역할은 없다. 다만 몇몇 철학자들의 저작은, 그것이 채택하는 표현이 유도하는 상상력으로 인해, 몇몇
옛백야
모든 철학자들이 자신을 칸티안이라고 부르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그만큼이나, 자신을 헤겔리안이라고 부르는 것을 치욕으로 여기는 것도 사실이다. 퍼트남은 어떠한가? 그는 스스로를 칸티안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해리슨은 그런 퍼트남을 개조하여 종교다원주의 모델을 만든다. 그런데 진정으로 그들이 칸티안이라면, 아주 진지한 칸티안인 힉과 배치된 모델을 만들 이유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힉과 해리슨은 아주 배타적이다.
옛백야
오랜만에 지평에 새로운 글을 올렸다: “추상적인 것에 관해 논쟁하기(링크)”. 내가 이 글을 통해 주장하려 했던 바는, 우리는 추상적 개념에 대해서도 그것이 가공의 것이 아닌 실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할 충분한 근거를 갖는다는 것이다. (또한 그것에 관해 잘 이야기할 수도 있다고 믿는 것에 문제가 없다고 나는 믿는다.) 이는 형이상학적 실재론을 지지한다. 한편
옛백야
최근 백야에 방문이 뜸했다. 인스타그램을 통해 논문 후기를 공유하기 시작했던 탓이다. (위젯을 하나 들여야겠다.) 또한 이곳에 옮길 만한 아이디어가 없기도 했다. 방학 중에는 학술논문 투고거리를 하나는 만들려고 했는데,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다. 원래는 무신세계, 유신세계 또는 타종교세계를 상상할 때의 불가능사고에 관한 논문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한국에서 논의된 적이 없던
옛백야
시를 쓰자면 마음으로 쓰지는 말자 마음으로는 어차피 쓰지 못 할 것 뿐이니 쓸 수 있는 것이거든 글이고 말 뿐이다 글로 쓰고 말로 쓰자 글로 쓰고 말자 마음으로 쓸 것은 마음에 남기자 정 남기지 못하겠거든 그리고 말아라 마음에 있는 것들 남기고 글을 쓴다 말로 남길 것들만 써서 시 한 편을 그리고
옛백야
종교적이지 않은 종교가 있을 수 있다. 신학적이지 않은 신학이 있을 수 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적임, ~성 등은 어떤 것의 전형이 이러저러함을 내포할 뿐이기 때문이다. ‘종교적이지 않은 종교’는 자기모순이 아닌, 파격적 종교라는 의미이다. ‘신학적이지 않은 신학’ 역시 유사한 표현이라고 봄이 맞다. ‘형이상학적 테제’, ‘인식론적 논제’, ‘윤리학적 주장’ 등의 표현에
옛백야
오지은이 필연적으로 도화지의 작은 점일 경우를 가정하자. “네가 없었더라면 나는 도화지의 작은 점이었을 것이다”는, 어떤 의미에서, 공허하게 참이다. “너”가 있든 없든 그는 도화지의 작은 점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네가 없었더라면 나는 도화지의 작은 점이었을 것이다”는 인지적으로 중대한 어떤 의미를 갖는 것처럼 보이는 것일까? 아마도 우리는 이런
옛백야
내가 ‘철학적 귀납법’이라고 말할 때, 의도하는 바는 이런 것이다. 여러가지 철학적 입장에 비추어 볼 때, 상당수가 c를 귀결로 갖는다. 따라서 c를 승인하는 것이 매우 설득력있다. 우리는 어떤 존재론을 가질 것이냐와 별개로 c를 승인할 좋은 이유를 갖는다. 한편 과학적 귀납법과 유사한 종류의 다른 철학적 추론이 있다. ‘형이상학의 가설-연역적 승인’ 혹은
옛백야
H가 이렇게 말했다. 존재는 존재자가 아니다, 또는 서구 존재론은 존재자들만을 탐구했다. 존재는 초월이고, 존재는 드러남이다. H의 어떤 추종자들은 이것을 아주 심오한 철학적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그다지 심오한 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진술이 담는 주장 자체는, 존재의 개념이 외연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 존재는 존재자로 인한 것이 아니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