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백야
집과 직장의 중첩된 어딘가; 그 중첩을 떠나며
오늘도 자유교양으로부터 “굴림” 당해버렸다. 50주년 기념 문집에 실릴 기사를 내라고 해서, 끝까지 미루다 후다닥 만들어 버렸다. 퇴고따윈 하지 않고 제출해 버린다. 그렇더라도 진심이 아닌 것은 아니다. 1. 꼬박 네 해를 채웠습니다. 대학 생활과 동시에 시작한 자유교양에서의 공동체 생활이었고, 이제 졸업을 해 3월이 되었니 딱 그만큼이 지났습니다. 그 사이에 많은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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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자유교양으로부터 “굴림” 당해버렸다. 50주년 기념 문집에 실릴 기사를 내라고 해서, 끝까지 미루다 후다닥 만들어 버렸다. 퇴고따윈 하지 않고 제출해 버린다. 그렇더라도 진심이 아닌 것은 아니다. 1. 꼬박 네 해를 채웠습니다. 대학 생활과 동시에 시작한 자유교양에서의 공동체 생활이었고, 이제 졸업을 해 3월이 되었니 딱 그만큼이 지났습니다. 그 사이에 많은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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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든 의무가 실현된 세계를 가정하자. 2. 그러한 세계가 상상 가능하다. 3. (의무의 세계에 대한 접근가능성) 따라서 그러한 세계가 접근 가능하다. 4. 어떤 x에게 있어, F가 불가능하다고 하자. 5. 바로 그 x에 대해, 모든 접근 가능한 세계에서 F(x)가 거짓이다. 6. 바로 그 x에 대해, F는 의무가 아니다. (의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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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어느 수업의 기말 페이퍼에서 나는 다음과 같이 논증했다. 거칠고 서툴지만, 여전히 나의 관심이 같은 곳에 있음을 보여준다. 서로 다른 주어에 대해 같은 술어는 실제로 같은 현상을 지칭하는가? 즉 “a가 생각한다”와 “b가 생각한다”는 a와 b에게 실제로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주장하는가? “x이(가) ~의 색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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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건이 신성 체험을 야기한다. 그 사건을 두고 계시라고 부른다. (또는, 어떤 존재자가 신성을 예화하는 사건이 계시이며 그것이 신성 체험을 야기한다.) 심적 표상은 오로지 신성 체험만을 내용으로 갖는다. 그러한 체험은 신성을 담지하거나 예화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신성과 면식 관계를 형성할 수 없다. (여기에는, 합리적 구성을 통해 신성을 개념화할 수 없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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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철학자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그가 사용하는 모든 단어를 그의 버전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통념이 있다. 예컨대 철학자 D가 말한 “개념”이라는 표현을 이해하기 위해 그의 (이른바) “철학”을 이해해야 한다. 이런 믿음이 타당한가? 그의 주장이 맞다면 D에 대한 바른 해석은 모두 불가능하다. 어떤 개념에 있어서도, 그 개념은 사적 의미망 속에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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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종과 인공종이 자연적으로 나뉜다는 믿음에 대한 불만이 있다. 그 경우 발생하는 형이상학적 부담이 크기 때문이다. 자연종을 포함하는 “자연적인 것의 모임”이 있다고 하자. 그렇다면 이 때 자연적으로 실재하는 것은 단지 자연종인 그것들 뿐 아니라 자연적인 것의 모임이 되는 “자연종 집합”까지이다. 그런데 집합의 개념이 자연적이라고 본다면 너무나 많은 추상적 존재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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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은, 철학은, 신학은, 대상 담론에 참여할 수 있는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타당하다. 두 이유에서 그렇다. 첫째, 비평 일반은 어떤 대상들의 존재 양상을 설명하는 행위이다. 그런데 대상이 되는 담론에 그것이 참여한다면, 그것은 스스로에 관한 언술을 내포한다. 이는 순환적이다. 한편 이는 명시적인 순환이므로, 나쁜 순환이다. 둘째, 비평 일반은 어떤 대상의 유적인 본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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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은 형식논리학과 언어철학, 인식론 등 체계에 관한 작업을 주로 했다. 한편 그는 인간주의자로서 다수의 에세이를 저술했고 정치적 활동에 뛰어들기도 했다. 두 활동은 내용상 독립되어 있었다. 그의 철학적 작업이 그가 세계를 보는 데에 영향을 주었을지도 모르지만, 철학적 작업이라는 것의 특성상 두 활동은 큰 상관관계가 없었을 것이다. 철학은 반드시 실천적 영역에 기여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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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현이 종종 쓰는 표현으로 “끝까지 밀고 가지 못했다”라는 것이 있다. 아마도 프랑스 철학하는 이들에게서 가져온 듯. 내가 쓰는 말은 아니긴 하지만, 딱 이 표현에 맞는 일들이 종종 보여서 생각이 났다. 대표적인 유형은 “구원”이란 무엇이냐는 문제에 관련된다. 모든 신학하는/한 이들이 안다. 구원은 내세로 쓩 떠나는 그 무엇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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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발제를 마치고 나서, 여정씨는 현대철학을 하셨다보니 역시 이런 걸 잘 정리를 하셨네요. 그렇지만 K의 한계는 그 시대의 한계이기도 하고, 이런 걸 비판점으로 보아야 할지는 생각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땐 그저 웃으며 넘기긴 했지만, 돌아보니 적어도 두가지 불만이 있다. 하나. 나는 철학도지 고고학도가 아니다. 내가 할 일은 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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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겨울에 어딘가에 어떤 메모를 남긴 적이 있었다. 메모의 요지는 추운 날 문을 꼭 잠그고 있는 이는 굶어 죽을 것이듯 힘겨운 날에 자기고립적으로 버틴다면 그는 살아갈 수 없으리라는 이야기였다. B는 나의 메모를 두고, “나는 그래도 문을 잠글래”라고 아래에 적었다. 나는 당시 이른바 “윤리적 통각”이라 할 만한 것에 매료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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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해 전의 일이다. 내가 출석하던 교회의 소속목사로 있던 H의 수업을 수강하고 있었다. 그는 비록 소속목사였지만 담임목사의 출타로 인해 부활주일 설교를 맡게 되었다. 그런데 그의 설교가 범상치 않았다. 한국 교회의 맥락에서, 그것도 대예배에, 예수의 부활은 물리적 몸의 부활이 아닌 형제들 가운데에 드러나는 예수 형상의 재현 사건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