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백야
실천적 철학자와 실천적 철학
러셀은 형식논리학과 언어철학, 인식론 등 체계에 관한 작업을 주로 했다. 한편 그는 인간주의자로서 다수의 에세이를 저술했고 정치적 활동에 뛰어들기도 했다. 두 활동은 내용상 독립되어 있었다. 그의 철학적 작업이 그가 세계를 보는 데에 영향을 주었을지도 모르지만, 철학적 작업이라는 것의 특성상 두 활동은 큰 상관관계가 없었을 것이다. 철학은 반드시 실천적 영역에 기여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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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은 형식논리학과 언어철학, 인식론 등 체계에 관한 작업을 주로 했다. 한편 그는 인간주의자로서 다수의 에세이를 저술했고 정치적 활동에 뛰어들기도 했다. 두 활동은 내용상 독립되어 있었다. 그의 철학적 작업이 그가 세계를 보는 데에 영향을 주었을지도 모르지만, 철학적 작업이라는 것의 특성상 두 활동은 큰 상관관계가 없었을 것이다. 철학은 반드시 실천적 영역에 기여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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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현이 종종 쓰는 표현으로 “끝까지 밀고 가지 못했다”라는 것이 있다. 아마도 프랑스 철학하는 이들에게서 가져온 듯. 내가 쓰는 말은 아니긴 하지만, 딱 이 표현에 맞는 일들이 종종 보여서 생각이 났다. 대표적인 유형은 “구원”이란 무엇이냐는 문제에 관련된다. 모든 신학하는/한 이들이 안다. 구원은 내세로 쓩 떠나는 그 무엇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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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발제를 마치고 나서, 여정씨는 현대철학을 하셨다보니 역시 이런 걸 잘 정리를 하셨네요. 그렇지만 K의 한계는 그 시대의 한계이기도 하고, 이런 걸 비판점으로 보아야 할지는 생각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땐 그저 웃으며 넘기긴 했지만, 돌아보니 적어도 두가지 불만이 있다. 하나. 나는 철학도지 고고학도가 아니다. 내가 할 일은 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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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겨울에 어딘가에 어떤 메모를 남긴 적이 있었다. 메모의 요지는 추운 날 문을 꼭 잠그고 있는 이는 굶어 죽을 것이듯 힘겨운 날에 자기고립적으로 버틴다면 그는 살아갈 수 없으리라는 이야기였다. B는 나의 메모를 두고, “나는 그래도 문을 잠글래”라고 아래에 적었다. 나는 당시 이른바 “윤리적 통각”이라 할 만한 것에 매료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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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해 전의 일이다. 내가 출석하던 교회의 소속목사로 있던 H의 수업을 수강하고 있었다. 그는 비록 소속목사였지만 담임목사의 출타로 인해 부활주일 설교를 맡게 되었다. 그런데 그의 설교가 범상치 않았다. 한국 교회의 맥락에서, 그것도 대예배에, 예수의 부활은 물리적 몸의 부활이 아닌 형제들 가운데에 드러나는 예수 형상의 재현 사건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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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떤 이들은 신앙을 인식론적 행위라고 주장한다. 즉, 신앙은 일종의 믿음 태도로서 신에 관한 명제적 지식을 대상으로 한다. 2. 충분한 권위를 가진 증언에 의한 것이 아니라면, 직접 경험의 대상에 관해서만 믿음을 갖는 것이 정당화된다. 3. 신앙은 직접 경험에 의해 정당화되지 않는다. 따라서 신앙이 인식론적 행위라면, 그것은 권위를 가진 증언에 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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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는 사람도 없이 갔고 모두가 잠든 새벽에도 시간은 흘렀다 텅 비어버린 그 교회당의 철탑 철탑을 감싸는 조명들 흰 빛은 다리 위에 닿고 “어린 때 동무들 /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 나는 무얼 바라 / 나는 다만, 홀로 沈澱하는 것일까?” 쉽지도 않은 시를 윤동주를 빌려 쓴다 (아니다 동주에게 빌어 쉽게 시를 썼다) 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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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성은 무조건성, 즉 궁극성에 기초한다. (*여기에서 “궁극성”이란, 그 이상의 원인 내지 근거를 찾을 수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2. 무조건성, 즉 궁극성, 즉 무제한성, 즉 절대성은 객관과 주관의 경계를 말소시킨다. 이러한 성격의 존재자에 대해서는 그 인식 내용이 실재적으로 담지하는 속성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3. 무제한성을 주장하지만 실제로 제한적인 것(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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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회의를 하다가 ㅍ이 그렇게 물었다. 우리 모임이 웹진을 추구할 것인지 동인을 추구할 것인지 확실히 하자고. 결국 우리 모임이 어떤 본질을 갖느냐는 물음이다. 난 사실 별 뚜렷한 생각이 있지는 않다. 동인이면 동인이고 웹진이면 웹진이다. 둘 다를 표방할 수 있다면 베스트일 것이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요청이긴 하다.) 뭐 여튼. 난 별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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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들이 말하는 양식은 이렇다: “A는 그의 저서 <a>에서 이렇게 말한다. ‘…p…’ 여기에서 p란 대체 무엇인가? 우리는 이를 위해 고대철학적 맥락을 살피지 않을 수 없다. p는 <b>에 수록된, C의 말에 등장한다. ‘…p..q..’ 그에 따르면 p는 q와 반대되는 개념이다. 여기에서 q는 어원적으로 “~”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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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운동에는 두 흐름이 형성되기 마련이다. 한쪽의 사람들은 공동체의 언어로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우리의 신앙, 우리의 신념, 우리의 느낌을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기호로 소통한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한다. 한편 다른 이들은 그것으로는 부족하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과 신념, 느낌을 사적인 기호가 아니라 공적인 언어로 풀어낼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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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생각이 나서 남겨 둔다. 유명론의 주장을 “종이나 속성 등의 보편자는 오직 그것으로 불리우는 존재자의 집합일 뿐이다.”(이 주장은 외연주의 의미론과도 상통한다. 그러나 이 주장이 그릇된 사례가 있다. 두 문장 “돼지는 네발동물이다”와 “돼지들이 집단폐사했다”를 생각해 보자. 두 문장에서는 “돼지이다”라는 술어가 공통적으로 사용된다. 한편 유명론자는 두 술어의 의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