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신학적 옹호

중세의 신학자들은 자연 세계를 통해 하나님의 본성이 고찰될 수 있었다고 믿었다. 한편으로 자연신학은 비판될 수 있다. 왜 그러한가? 자연세계 역시 하나님의 은총이 경유되지 않으면 하나의 계시로 발견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 비판은 아주 근대적인 정신에서 나올 뿐이다. 이 비판은 세속에 대한 신성의 존재론적 우위를 주장할 수 없는…

Creatio ex nihilio

“무로부터의 창조”가 가능한가?: 첫째. 신적 창조는 어떤 창조인가? 질료에 대한 창조라면, 그러한 창조는 무한퇴행적 창조이다. 신이 오로지 정신적인 것이 아닌 한 바로 그 신을 누군가가 창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이 오로지 정신적이라면, 그것은 질료적 차원에 인과적 영향을 줄 수 없다. 따라서 어떤 경우에도 질료에 대한 창조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신적…

치유

* 여러가지 방식의 치유가 있다. 어떤 문화는 치유를 위해 물리적 방식을 동원하고, 어떤 문화는 상징을, 어떤 문화는 언어를 동원한다. * 이원론적 종교가 하나의 치유 방식으로 작동한다. 어떻게? 탄원자의 특정한 결여에 대해, 그 결여를 악신의 책임에 돌린다. 문제는 여전히 남지만 그 탓은 저 멀리 있는 악신에게 있다. * 상담이 하나의 치유 방식으로 작동한다. 어떻게?…

공정성

* 공정성이란 그런 것이다. 정말로 비상식적인 누군가가 있다. 또한 그 사람의 상식 없음이 사람들에게 불편을 초래한다, 또는 공무에 차질을 초래한다. 그 경우, 비상식적인 그 사람을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으로 하여금 상식을 갖게 하거나, 최선으로는 비상식적인 사람의 최대한을 포괄할 법한 정책을 기획하는 것이다. * 이른바 “태극기 시민”이 있고 “촛불 시민”이…

몇 가지

* 이른바 “오지랖”이라는 것에 이물감을 크게 느끼는 요즈음이다. 직접적으로 드러난 것은 D의 여러 말들에 대한 과민한 반응이었다. 사실 그것이 유일한 징후이거나, 또는 원인이었던 것은 아니었을 터이다. 나는 자주 그런 간섭에 지쳐했고, A에 대해서도, 나의 경계를 넘어서는 듯한 그런 관심에는 쉽게 불편함을 느꼈다. 조금 달라졌는가 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전혀…

글쓰기의 신비로움

뭔가를 쓰고 나누는 것에 경력이야 짧다. 그럼에도 그 사이에 재미있는 발견을 한다. 시이건 설교문이건 그 밖의 다른 장르이건 글이 스스로 나를 특정한 수사로 인도하곤 하는 것이다. 의도하지 않는 중의적 문장(그리고 그것이 이중적인 심상을 만드는), 문단 간의 균형, 계획한 논증에는 포함되지 않던 주장의 흐름 등이 발견되는 것이다. 이러한 인도가 어떤…

헤겔 (1)

J 박사께서 역한 책을 읽는다. 헤겔의 종교철학적 입장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학부에서 헤겔을 배울 일이 없었다. 개론에서 다루기엔 너무 큰 주제이고, 헤겔만을 다루기엔 너무 깊어질 것이어서 그랬던 듯하다(우리 학교에는 헤겔 전공자⎯⎯참 이상한 단어이지만⎯가 없다). 여튼, 그래서 헤겔을 배울 일이 없었다. 저자의 헤겔 이해가 탁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또한 형이상학적으로도”

하나의 사건이 추후에 재현될 수 없음에 대해 이전 글에서 “(나는 또한 형이상학적으로도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라고 덧붙였다. 왜 그런가? “야기되는 것”이라는 사건의 정의는 적어도 그것이 특정 시공간 점에서 나온 결과임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러한 점에서 나왔다면, 그 사건은 그 점에서 재현 또는 표상되어야만 한다. 그런데 바로 그 표상은 주체(그것이…